<백야행>의 '요한'으로 돌아온 배우 고수를 만나다
4년 만의 복귀작, <백야행>을 집어삼키다
유명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배우들에게 양날의 칼이다. 원작의 지명도가 흥행으로 직결될 수 있지만, 수많은 독자들이 머릿속에 그려놓았을 '완벽한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건 불가능한 미션일지도 모른다.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도 기대만큼 우려가 높은 작품이었다. 14년 전, 지울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시작으로 잔인한 운명에 사로잡힌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 장장 3권에 걸쳐 그들의 속내를 파고드는 소설을 두 시간에 압축시킨 영화로 과연 미호와 요한의 감정이 관객의 심장을 파고들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객들은 상상 속 그 인물들이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짜릿한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미호와 요한의 긴 비극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영화의 전반부가 사건 자체를 통해 긴장감을 유발시킨다면, 영화의 후반부에선 인물들의 감정만으로 긴장감이 증폭된다. 그리고 폭발의 핵은 고수가 연기한 요한이다.
기자 시사가 끝나자 고수의 휴대전화에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밀려들었다. 2006년 군 입대 후 꼬박 4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복귀작에 칭찬이 쏟아지는 상황이 흐뭇할 법도 한데, 그는 좀처럼 들뜬 기색이 없다. "주변 분들이 과한 칭찬을 해주시는 것 같다. 지금도 걱정이 많다. 원작의 내용을 알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어떻게 보실지 너무 궁금하다. 칭찬이든 날카로운 비평이든, 관객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다."
시작으로 돌아가 보면 고수를 <백야행>으로 이끌어준 것도 관객의 힘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에 손예진, 한석규의 출연 확정으로 탄탄대로가 열린 상황에서 마지막 과제는 남자주인공 '요한'의 캐스팅이었다. 박신우 감독은 고수를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의 앳되고 소년 같은 이미지는 걸림돌이었다. "제작사에서 소설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가상 캐스팅을 했는데, 요한 역에 내 이름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관객들이 '고수'라는 이름을 아직 기억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감사하던지…. 그 덕에 2008년 10월쯤에 <백야행>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고수는 정말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허허 웃었다.
시나리오는 쉽지 않았다. 파격적인 첫 장면을 시작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구성에 대사도 거의 없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첫 느낌은 충격이었다. 확실히 쉽게 읽히는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재미있는 만큼 어려웠고, 읽으면서 계속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장면의 의미를 되새길수록 매력적이었다. 욕심이 생기더라. 며칠 만에 바로 제작사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이 작품을 기다려 온 것 같다고."
출연을 확정 지은 후에, 고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
백야행>은 방대한 이야기 속에 섬세한 감정이 쌓이며 몰입도가 높아지는 작품이다. 일본에서도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제작할 만큼 긴 호흡을 중시했다. "긴 이야기와 인물의 감정을 두 시간 안에 관객들에게 모두 이해시켜야 하는데, 말 그대로 미치겠더라."
요한에게 온 몸을 내어주다
고수가 택한 방법은 오롯이 시나리오 속 요한에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설도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 소설과 드라마를 보고 나면, 이미 완성되어 있는 요한에게 휘둘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수만의 요한'을 찾는 과정에 집중했다. "요한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영화적인 인물이다. 내가 요한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요한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관객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수가 요한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요한으로 보여야 했다."
이야기와 인물들의 관계를 압축하다 보니, 시나리오는 요한이 저지른 범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칫하면 그저 악랄하기만 한, 인간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살인마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수는 요한이 애처로웠다. 그 애처로움을 관객에게 이해 받기 위해서는 그처럼 행동하고, 움직이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3월부터 6월까지 가장 볕 좋은 봄날에 <
백야행>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고수는 철저히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낮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집 안에서도 불을 끄고 커튼을 내린 채로 방문을 걸어 잠갔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대신 밤이 되면 얼굴을 가리고 동네를 달렸다.
"요한의 삶은 마치 꿈속은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현실의 질감도 없이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닌다. 요한에게 손끝 발끝까지 모두 내주기 위해서는 그렇게 사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마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빛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 태어난 것까지 죄스러울 만큼 자괴감에 시달렸을 테니까. 그렇게 요한에게 온 몸을 내어주면 관객들이 요한의 진심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절실한 소망을 품고, 요한으로 살았다."
고수의 소망은 이루어질 것 같다. 요한이 '삶의 빛'인 미호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는 과정은 섬뜩하기보단 애잔하다. "일면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일면 누구라도 요한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내게 미호 같은 연인이 있다면, 그토록 상처받고 아파하는 연인을 두고, 편하게 잠을 자고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아마 잠을 잘 수도, 밥을 넘길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 치열하고 미친 사랑을 무조건 '옳다'고 우기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이라고 이 질기고 잔인한 운명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한 번쯤 요한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줘야 한다면, 그게 언제일 지 많이 고민했다. 딱 한 번 요한이 빛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지만, 결국은 미호를 위해 꺾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요한의 진심을 관객들도 눈치채주면 좋겠는데….(웃음)"
<백야행>이 공개된 뒤 화제가 된 고수의 파격적인 정사 신은 고수가 꼽는 '가장 슬픈' 장면이기도 하다. "많이 힘들었다. 큰 스크린에 요한의 포장되지 않은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신이다. 요한이 얼마나 절실한지, 한 장면으로 많은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신이기 때문에 부담도 컸다. 내 알몸이 어떻게 나올지도. 기왕이면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웃음) 하지만 외적인 부분은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손끝 발끝까지 감정을 전하기 바빴다."
촬영이 끝난 지 반년이 다 되어 가지만, 고수는 아직도 요한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화 속에서 요한이 끝내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지 묻자, 고수의 눈이 아련해졌다. "요한이 계속 마음에 품었지만, 입 밖으론 내지 못한 말이 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미호가 빛이라면, 요한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그림자로 남아야만 한다. 요한은 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배우라는 말, 그것만으로 황송하다
<백야행>은 '고수의 재발견'으로 기억될 법하다. 그에게서 앳되고 섬세한 소년의 유약한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더 큰 변화는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백야행>은 내게 시험대 같은 작품이었다. 작품에 임하는 자세와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짧지 않은 공백 기간을 겪으며, 그는 연기에 대한 치열함과 진심을 쌓아갔다. 2006년 초부터 공익근무를 하는 동안,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고민했다. "스스로도 내가 언제 연예계 생활을 했던가 싶을 만큼 평범하게 살았다."(웃음) 그러던 중 고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꿈을 떠올렸다. "연극무대에 서보고 싶었다. 그래서 극단 골목길에 무작정 잠입했다. 처음에는 안 받아들여 주시더라. '연예계 물을 먹는 날라리'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웃음) '뭐 저렇게 잠깐 들락거리다 말겠지'라는 시선이 많았다."
그는 아는 척도 안 해주는 극단에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었다. 퇴근 후에 찾아가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하고, 포스터를 붙였다. 주말에 지방 공연이 있으면 쫓아가서 허드렛일을 자처했다. "그래도 절대 무대에 세워주진 않더라.(웃음)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게 눙치다 보니 연극하는 친구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줬다. 매일 청소하고, 만날 저녁에 모여 술 한 잔 하며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정말 즐겁고 좋았다. 그래서 눌러 앉았다."
결국 그는 2008년 5월 박근형 연출가의 <돌아온 엄사장> 무대에 서는 기쁨을 누렸다. "연기 내공이 부족하다 보니, 카메라 앞에 설 때와 무대에 설 때가 많이 달랐다. 연극을 한 뒤 다시 <
백야행>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연극 무대의 습관이 남아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극단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경험도 많이 했다. 데뷔하기 전에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고 고생도 꽤 했다고 나름 자부했다. 그런데 나는 온실 속의 화초더라.(웃음) 나도 모르게 남들이 챙겨주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인간으로서도 벽을 만들고 살았던 것 같다." 극단 생활을 통해 마음도 채우고, 대학원에서 연기 연출을 공부하며 머리도 채웠다. 자랑해도 좋을 만큼 알찬 공백 기간이다.
<백야행>으로 성공적인 복귀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고수의 다음 행보는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다. 한예슬과 함께 출연하는 이 드라마에서 그는 오랜만에 정통 멜로에 도전한다. "제목은 발랄한데, 내용은 진중하다.(웃음) 차강진이라는 인물을 맡았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태어나 술집과 다방을 하는 어머니 품에서 자라 상처가 많은 남자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남에게 한 번도 져 본 적 없고,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인물이다. 그가 마음을 두드리는 한 여자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인데, 요즘엔 정통 멜로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기대가 크다. 오랜만에 드라마 현장에 가다 보니, 하나하나 다 재미있다.하지만 다시 브라운관에서 내 모습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 굉장히 쑥스럽기도 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없다"고 답한다. 이번 작품을 열심히 하고, 다음 작품이 찾아오면 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계획을 꾸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매 작품이 끝나면, 생각한다. 아직은 부족하다. 더 쌓아야겠다. <백야행>도 마찬가지다. 내 눈엔 부족한 부분만 보인다.(웃음)" 원래 이런 사람이 더 무서운 법. 그릇이 크고, 제 그릇의 크기를 알기에 매번 채우고 덜어내기를 반복하며 일희일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난 아직 배우가 아니다. 아직 연기를 '배우'는 사람이랄까.(웃음) 지금까지는 연기라는 도구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법을 연습한 것 같다. 그리고 이제야 치열하게 연기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그러니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언젠간 '배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수식어도 필요 없다. 그냥 '배우'. 얼마나 황송한 이름인가! 더 욕심은 없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