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영화* 상의원

눈 내리는 날, 고수와 나눈 이야기

jun9min 2014. 12. 19. 20:34

http://www.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MI_ID=MI0100762012

 

 

 

고수를 만난 날, 눈이 내렸다. <상의원>의 아름답고도 슬픈 마지막 장면에서 공진만 눈을 맞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내리는 눈발 속의 고수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눈의 서늘함과 온기에

닿아보려는 공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리는 눈처럼 세상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가려는

수와, 영화 <상의원>과 배우 고수의 오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눈이 내리니 <상의원>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맞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공진이 나오는 장면은 아니었지만 보고 싶어서 촬영장에 갔었다.

배우들이 하늘을 보고 있는데 ‘울게 하소서’가 울려 퍼지고, 나도 울고 싶어졌다. 그 장면에 모든 인물의

 심정이 녹아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참 좋았다.

첫 번째 사극이다. 게다가 공진이라는 캐릭터는 지금까지 고수의 연기에서는 벗어난 지점이

있는 인물이다. 자유로운 영혼이고, 천민에다가, 좀 더 가볍기도 하고. 사실 곤룡포가 어울릴

 얼굴이 아닌가.(웃음)
왕이 더 잘 어울릴까? 잘 모르겠다. 일단 공진은 좀 더 자유롭게 밝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게 첫 장면에서

 확실히 보여졌으면 했다. 그래서 성룡이나 이소룡을 연상시키는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연구했는데

생각만큼 영화 속에서 잘 표현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공진은 사극 안에서도 새로운 캐릭터고,

나중에는 극의 톤이 무거워지면서 진지한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작품의 매력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렵기도 했을 거다. 인물의 감정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스타일인데, 공진은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질투나 복수심도 없지 않나. 공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었나?
그 점이 가장 힘들었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공진이 천민이고, 근본이 없는 인물이라는 걸 인식하면

 궁에 들어가기만 해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이원석 감독은 공진에게 다른 것을 원했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 그 부분에 주목을 하며 연기를 했다. 계속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고,

스스로도 공진의 ‘다름’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질지를 고민했다.

돌석과 공진의 관계가 분명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대(돌석)와 "입어서 편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신념을 제외한 허례

허식은 모두 떨치려는 새로운 세대(공진)와의 부딪힘으로도 보인다. 본인은 어떤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
실은 어느 쪽도 아니다. 둘 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켜야 할 것도 있고, 이제 없어져야 할 것도

 있고. 배우로서 중간 세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배우라고 말할 정도의 자신은 생겼다”

그러고 보면 이번 작품에서는 중간의 역할을 했다. 한석규와 유연석 사이랄까.
특별히 의식을 한 건 아니지만, <상의원> 촬영 현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편한 부분이 있었다. 선배와 연기를 한다거나 후배와 연기를 한다고 해서 사실

특별히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치가 변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최근 들어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연기,

지금 나이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계기랄 건 없다. 그냥 눈을 떠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다(웃음).

 

<상의원>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연기는

노력이 필요한 장르일까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20대 때는 소위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연기’에 대한 질투가 있었다. 게다가 연기 외의

것에도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었고. 좀 산만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날이 갈수록 느껴지는 건,

연기는 결국 노력이라는 거다. 끊임없이 세상에 관심을 갖고, 생각하고, 더 깊어지려고 해야 한다.

 내가 아직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그런 노력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다.

“예술은 우연이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연기도 끊임없는 노력,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인

것 같다. 계속 열심히 하고 싶다. 이왕이면 잘하면 좋겠고.

영화학으로 대학원 석사학위를 딴 것도 그렇고, 공부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편이다. 책도 많이 읽고, 이런 저런 경험도 해보려고는 편이다. 이 길이 끝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대 때처럼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한 캐릭터 같은 것만 하려고 하거나,

극단적인 연기만 고집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캐릭터에만

 끌렸다.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안다. 한 때는 "배우세요?"라는 질문이 두려웠다. 내가 감히, 같은 마음도

있었고 고귀하고 무거운 이름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의

자신은 생겼다.

 

확실히 여유, 안정 같은 게 엿보인다. 팬들을 만나거나, 대중 앞에 설 때도 이전보다 자연스럽고

 편한 느낌이 들던데.
전에도 편하고 즐거웠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어하진 않았다. 단지 잘 표현을 못했던 것 같다.

 표현력이 뛰어나거나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팬들을 만날 때도, 촬영장에서도,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도 좀 더 표현을 할 수 있게 됐다. 계속 말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데뷔 16년 차. 세월이 주는 무게감이 좀 느껴지는가?
벌써 16년이나 됐나? 그렇게 무겁다고는 느껴지지도 않고. 그 시간을 굳이 의식하지는 않는다. 다행인

건 이제 연기 이외의 부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게 좋다.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연기를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에너지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있다고 느낀다. 이걸

연기에만 쏟을 수 있어서, 지금이 좋다.

공진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앞으로 맡을 캐릭터에도 새로운 면들을 찾고 싶을

 것 같은데, 대중은 ‘고수의 얼굴’ 이를테면 슬퍼 보이는 눈이 드러나는 캐릭터에 더 끌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나?
캐릭터를 볼 때 외모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생겼으니까 이런 캐릭터 안에서 연기해야지,

 이건 아니다. 전에는 평범한 사람이 더 좋았고 끌렸다. 내가 평범하니까. 그리고 군 전역 이후로는 일단 좀

 다양하게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다작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일을 쉬지 않은 이유도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차기작이 중요할 것 같다.
아직 차기작이 확정되지는 않았는데,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지금 공진 역을

했으니까 다음은 좀 더 다른 캐릭터, 아니면 비슷한 캐릭터, 이런 식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작품,

 모든 캐릭터가 중요하다. 그런 자세로 임하려고 한다. 나에게 맞는 캐릭터만 찾는 게 아니라 내가

맞춰가면서 다양한 작품을 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캐릭터와 내가 딱 맞아 떨어지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제작발표회에서 한석규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배우는 나이가 드는 걸 기다리는 직업이다."

 최근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 이제 얼굴에 나이가 보이더라. 배우는 그런 걸 숨길 수 없다. 지금 이 나이의,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

글 윤이나(칼럼니스트)│사진 이경진